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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1

늦다

조회 수 5277 추천 수 0 댓글 2

  “엄마......!”

 

   헉헉하고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불이 환하게 켜진 내 방 천장이었다.

 

   “내가 불을 안 끄고 잠들었던가..”

 

   혼잣말을 하며 숨을 고르고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엄마의 꿈을 꿨다. 요즘 너무 피곤했던가. 마치 엄마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이 생생했던 그 꿈을 애써 지워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물을 마시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일어나기도 자기도 애매한 시간. 이제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잊을 만도 하다고 다 잊었노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엄마는 참 밝은 사람이었다. 참 소녀 같고, 예쁘고, 여리고 그랬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나는 독립하여 혼자 살기 시작했고,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다. 3년 전 별안간 엄마에게 자주 연락이 왔고, 나는 그저 엄마가 딸을 보고 싶어 그러나 보다했다. 그렇게 엄마와 자주 연락하고 한 달 즈음 지났을까? 엄마는 나를 만나기를 원했고 없는 시간 쪼개서 엄마를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기를 한 일주일정도 했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내 눈앞에서 자살했다. 그 때도 예뻤다 우리 엄마는. 내가 그게 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끔찍하게도 예쁜 그 모습 그대로 가버렸다. 다리에서 뛰어내린 엄마는 119를 불러 급히 구조를 했음에도 저체온증과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원래도 몸이 약한 사람이기는 했다. 여리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딸 앞에서 뛰어내리는 대범함을 가진 사람이었다니. 그 때의 그 충격은 여러모로 내 인생에 큰 타격을 주었다. 지금까지도.

  

  

   침대 맡에 둔 두통약을 주섬주섬 꺼내 삼키고는 책상에 앉았다.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엄마의 얼굴이 어른거려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기가 싫어서 아니 계속 그 때의 그 꿈이 생각나서, 그 때의 내가 싫어서, 그 때의 엄마가 미워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조금 진정이 될 것 같았다. 다시 부엌으로 가서 아빠가 좋아하는 민트티를 우려냈다. 따뜻한데도 청량한 그 맛이 좋아서 나도 좋아하게 됐다. 한 모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두통약 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이겠지.

    

 

   아빠는 참 착하고, 착하고, 착해서 나쁜 사람이다. 나 없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빤 엄마와 이혼하고 한 동안 정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그냥 숨만 쉬며 산 것 같다. 회사도 그만두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그나마 술은 마시지 않아 다행이었다. 매일매일 엄마랑 헤어진 건 다 본인 탓이라며 슬퍼하기 바빴다. 이래저래 내가 챙기지 않으면 일상생활조차 안 될 정도였다. 그 덕에 나는 독립을 했지만, 독립을 안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올까 했지만 그건 또 싫었다. 하지만 저러다 우울증에 걸릴까봐, 그러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도 학교 가는 시간 외에 혼자 두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니 점점 일상생활이 가능 할 정도로 회복되었고, 지금은 가게를 차려서 그나마 혼자 먹고 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가끔 진상 손님이 와서 행패를 부려도 굽실거리며 죄송하다고 연발하긴 하지만.

 


  민트티를 들고 나는 화실로 향했다. 엄마가 죽고, 나는 그림을 그리며 내 마음을 많이 달랬다. 그 이후에 방이 2개 딸린 집으로 이사하면서 하나는 침실 겸 서재 하나는 화실로 꾸몄다. 집에서 마음껏 그림 그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젤에 새하얀 캔버스를 올리고 슥슥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냥 왜 가족사진 같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핸드폰 사진첩을 뒤져 옛날 우리 가족사진을 찾았다. 소녀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엄마, 눈이 휘어지도록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빠,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천진하게 웃고 있는 나. 좋다. 좋아 보인다, 우리가족이.

 

   “진짜로 화목해 보이네. 정말.”

 

   내가 어렸을 땐 그랬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과 외동딸인 나. 공부를 잘해도 못 해도, 노래를 잘 불러도 못 불러도, 그림을 잘 그려도 못 그려도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그래, 그 때도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나중에 미대를 가야겠다고 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래에서는 꽤나 잘 그렸던 것 같다. 나는 학교를 다녀와서 항상 그림을 그렸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아빠, 선반을 고치는 엄마, 피아노를 치는 아빠와 기타를 치는 엄마, 우리 세 식구 함께 자는 모습,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나는 그냥 우리 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부모님이 퇴근하시면 그 그림을 자랑하곤 했다. 그 그림들이 모여 어느 새 내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 그 그림이 몇 번이나 바뀔 때 까지 우리 집은 행복했다. 주말엔 소풍을 갔고, 아님 세 식구 모여앉아 영화를 보고, 그것도 아님 한 침대에 누워 해가 지도록 늦잠을 잤다. 그 땐 참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땐.

    

 

   밑그림을 다 그리고 한 참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엄마는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나는 왜 힘이 되어주질 못했을까. 나는 왜, 왜 엄마를 구하지 못했을까. 아빠가 그렇게 힘들었을 때 나는 왜 힘이 되어주질 못했을까. 나는 왜 아빠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질 못했을까. 왜 우리 가족은 이렇게 흩어지게 된 걸까. 우리 참 좋았는데 행복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엄마는 내 곁에 없고, 왜 아빠는 저렇게 굽실거리며 무시당하고 살까. 속상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이 무기력한 내가 너무 싫다. 이제 엄마도 없고 아빠도 이제 겨우 힘을 내서 열심히 살고 있고. 근데 나는 괜찮지가 않다.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아니 늦었어, 이미. 그 때 그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 버린 거다, 이젠.




  • 어두운 슬픔이 짧은 글 안에 가득 담겨져 있는 듯 합니다.
    덤덤한듯해 더욱 슬퍼지는 글이네요...
    잠시 중간에는 늘어지는 듯 했지만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 오게끔 하는 글이네요!
  • 무슨 이유들 때문에 한 가족이 분열 된 걸까요.. 사진에는 그저 좋아보이지만 그 속에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었을 것 같습니다
    1인칭 입장에서 매끄럽게 잘 쓰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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